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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부

운영자 2010.04.15 11:37:03
조회 338 추천 0 댓글 1

  20대 중반의 청년 두 사람이 사무실로 들어섰다. 한 사람은 땅딸막한 체구에 헐렁한 바지와 잠바를 입고 있었다. 또 한 사람은 호리호리한 몸에 약간 날카로운 눈빛을 띤 인상이었다.


  “변호사님, 사건을 맡기려고 왔는데요. 조건부로 해주시죠.”
 
  “조건부라니요? 무슨 말씀인지 더 구체적으로 해 보시겠습니까?”

  “아, 왜 사건이 우리 요구대로 되면 돈을 받으시고 안 되면 전부 돌려주시는 거 말입니다.”

  그들은 당연한 걸 도리어 내가 묻는 것이 이상하다는 눈치다. 한 청년이 두꺼비 같은 눈을 껌뻑껌뻑 뜨면서 내가 다음 할 말을 기다린다.


  “일단 사건의 내용을 들어봅시다.”

  나는 일단 변호할 사건의 내용을 듣고 싶었다. 찾아온 두 사람이 지금 구속된 친구들의 범행 내용을 얘기한 것은 대충 이랬다. 며칠 전 밤이었다. 친구 두 명이 미아리의 사창가인 속칭 텍사스 골목에 들어가 술을 마시다 옆방의 일단의 다른 청년들과 시비가 붙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싸움이 붙어 큰 대로상에까지 나와 난투극을 벌였는데 그 와중에서 청년 중 하나가 쇠파이프를 휘두르다가 지나가는 행인의 목을 때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야구방망이로 그 일대의 가게 유리창들을 닥치는 대로 때려 부쉈다는 내용이었다.


  “그 정도면 두 사람이 난동을 부릴 당시 공포상황이 환하게 연상되는데 두 사람 전과는 어떻게 되나요?”

  “한 사람은 폭력 사건으로 현재 집행유예 기간 중이고요. 다른 사람은 역시 폭력으로 별을 셋 달았습니다.”


  그 말이면 이미 폭력범으로서 이력이 나 있다는 소리였다. 동정의 여지도 별로 없고 변호사를 선임하려는 태도도 돈으로 해결을 하자는 냄새가 역력했다. 그런 사람들 중 상당수의 사고방식은 변호사를 통해 담당 검사에게 돈을 가져다주면 쉽게 벌금형으로 되어 석방될 것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변호사는 사안을 파악하고 숨겨진 진실이 있나를 찾아 변론하는 게 그 한계입니다. 그 노력에 대한 대가로 일정액의 보수를 받습니다. 그런데 변호사가 한계를 넘어 결과에 대해까지 책임을 지는 조건으로 선임비를 받는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생각인데요. 비유를 하자면 의사가 열심히 치료를 했는데 병이 호전되지 않으면 치료비, 입원비 일체를 환자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것인가요?”

  나는 내심 불쾌한 감정을 억누르며 그들에게 변호사의 본 임무를 밝혔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돈 몇 푼에 모든 것의 면죄부를 사려는 배금주의 사고에 철저히 물들어 있는 것이다.


  “그래도 힘들게 돈을 구하고 그 돈이 작은 것이 아닌 다음에야 보장이 없으면 어떻게 사건을 맡기겠습니까? 다른 변호사 사무실에 가서 물어 봤더니 다 조건부로 하는 것에 동의하고 사건이 제대로 안 되면 돈을 돌려주겠다고 하던데요..”


  “변호사는 자기의 능력 밖의 것을 약속하고 보장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것은 현직에 있는 판사나 검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자기가 다루는 사건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그 사건을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판사나 검사들도 자기가 맡은 사건이라도 사건마다 처리하는 기준이 거미줄 같이 세밀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또 검사의 경우는 독단적으로 처리하기 보다는 상사의 결제를 통해서 그 사건이 이중 삼중으로 적정하게 처리되었는가가 체크합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그대로 할 수 있는 것일까요? 보장을 한다고 말을 한다면 제 생각으로는 그것은 분명히 거짓말이라는 생각입니다. 어떤 변호사가 보장까지 하던가요? 그 사람을 가르쳐 줄 수 있습니까?”

  나는 단호하게 물었다.


  “사실은 변호사가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고 사무장이 그렇게 하자고 했습니다.”

  두 청년은 일응 말은 수긍이 간다는 듯 뒷머리로 손을 가져갔다. 그렇게 말을 했지만 나 자신도 한쪽으로 분명 거역할 수 없는 어떤 수긍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돈을 쓰는데 어떤 보장도 없다. 변호사가 어떻게 변호활동을 하는지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다. 결국 일 안 하고 돈만 받아 챙겨도 당사자로서는 확인할 방도가 없는 것이다. 또한 반대의 겨우도 체험했었다. 사건을 맡긴 당사자의 얘기를 듣고 주변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열심히 실체를 파악해 간다. 법정에서 증인신문을 하고 변론을 하고 관련 증인들에게 욕을 먹어가면서까지 활동을 한다. 밤을 새우면서 원고를 준비하고 판례를 뒤적인다. 선고를 받는 날이면 내가죄인이 된 듯한 기분으로 온몸이 긴장으로 팽팽해지기도 한다. 지은 죄가 워낙 중해서 그냥 용서받기는 곤란한 것이라 마침내 실형이 나오는 경우도 많다. 그런 때 사건을 맡긴 사람이 찾아와서 ‘아무 것도 하신 것이 없잖아요?’ 하고 하얀 눈길을 보낼 때면 내가 왜 이런 일을 맡아서 하나 하는 허탈감도 여러 번 드는 것이다. 결론은 서로 믿음으로 연관되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나오든 불신만 남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조건부로 사건을 선임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 아무리 급하시더라도 그런 말을 믿고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은 옳지 않은 태도입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들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면서 돌아갔다.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고 아무것도 확실한 말을 하지 않은 내가 그들에게는 아무런 안심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사실은 친구 아버지의 말을 듣고 변호사님을 선임하려고 돈까지 가지고 왔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고 연락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돌아갔다. 사회가 영악해지면서 점차 법에도 경제법칙이 파고 들어오는 것 같다. 예를 들어 20억을 횡령한 사람은 속으로 1억의 변호사비를 들여서 로비를 하고 석방되기만 하면 19억이 이익이라는 생각을 하루 수가 있는 것이다. 범죄에 대한 죄책감은 사실 찾기 힘들다. 남들이 다하는데 내가 왜 못해 하는 심정인 것이다. 내가 청렴하다가 가족과 자식들이 굶으면 누가 칭찬하고 먹여 살려준대? 훈장이라도 준대? 하는 심정들인 것이다. 그런 곳에서 암세포처럼 조건부가 나오기도 하는 것 같다. 혹시나 변호사가 제대로 뛰지 않을까 하는 불신감에서 조건이 붙는다. 선고 결과가 좋지 않으면 돈을 회수한다는 것이다. 돈 벌고 싶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뛰라는 계약조건인 것이다. 불신이 연결된 고리처럼 서로 엮이는 것이다.


  언젠가 잘 아는 변호사가 은밀하게 이런 말을 해 준 적이 있다. 조건부로 선임을 하러 온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있을 수 있는 조건을 모두 만들어 사건을 선임하라는 것이다. 그 조건 안에는 소송의 결과에 따른 여러 가지가 액수만 다르게 책정되어 거의 망라되게 말이다. 그렇게 하면 가만히 있어도 그 중 하나에는 걸리게 되므로 결코 손해 보는 일이 없게 되고 조건부로 선임하는 사람만 자승자박하게 된다는 논리였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속으로 불쾌했었다. 그것은 정말로 한 수 더 뜬 사기이기 때문이었다. 궁박한 사람을 가지고 노는 가장 파렴치한 말이기도 했다. 불신에 불신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면 결국 남는 것은 파멸이 아닐까. 그 청년들이 간 후 다음날 나는 그들에게 나를 소개했다는 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래도 나를 찾게 소개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인사였다. 그는 사업을 하는 분이었다.


  “청년들 얘기를 들어보니 조건부도 일응 일리 있는 얘기든데 원 변호사님도 고지식하기는.. 그래 가지고 돈을 벌 수 있겠어요? 그래 일단 말 한마디면 돈이 들어오는 판인데 그걸 놓친단 말입니까? 하여튼 알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안됐다는 듯 혀를 끌끌 차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그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안개 같은 기쁨이 살며시 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돈의 우상을 만들지 않았다는 승리감이었다. 또한 고지식이라는 칭찬이었다. 내가 그들의 사고와 그에 대처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렇게는 살기 싫어서 거절한 것이다. 여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당장 사무실 유지비가 모자라는 가운데서 옳지 않은 돈을 물리쳤다는 것에 대한 승리감이었던 것이다.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나는 아내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잘했수. 당신 그렇게 치사하게까지 돈 벌려고 힘든 고시공부 했수? 그런 사건은 떼돈을 가져다준다고 해도 선임하지 말아요. 인생 살아야 얼마 산다고 돈 받아 놓고 신경 쓰고, 잘못되면 돈 돌려주고 배 아프고, 그런 건강 갉아 먹을 짓을 왜 하누? 여보 절대로 그런 짓은 하지 말아요. 당신이 돈 못 벌면 내가 벌어 먹일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양심적으로 일하세요.”

  아내는 당당하게 나를 격려했다. 그건 내게 훈장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아내로부터 인정받는다는 것보다 더 신나는 일이 있을까? 나는 잠자리에 든다. 그러면서 한마디 기도한다. 진정으로 내게 믿음을 보내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서 변호하게 해 달라고 말이다. 늦은 밤 건너다보이는 아파트에 남은 몇 개의 오렌지 색 불빛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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