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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먹지 뭐! 1

운영자 2010.04.15 11:39:37
조회 409 추천 0 댓글 0

  1995. 2. 28. 오후 서울고등법원 303호 법정. 나는 변호를 맡은 피고인의 재판 순서를 기다리느라고 방청석 앞자리 쪽에 무료하게 앉아 있었다. 그 때 밤송이 같은 머리를 한 죄수 한 사람이 법정으로 끌려 나왔다. 이십대 초로 보이는 그는 잉크 빛의 헐렁한 면으로 된 옷을 입고 있었다. 둥그런 얼굴에 작게 달라붙은 코가 약간 코믹하게 생긴 듯 하다. 교도관이 피고인석에 그를 앉히자 그는 한쪽 다리를 다른 무릎 위에 턱 올려놓았다. 보통은 두 발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는 등 어떻게 해서든 용서받고 싶은 자세를 취한다. 특이했다. 그는 마치 소파에 편하게 앉아 아주 만만한 상대방과 대화를 할 때의 자세를 취한 것이다. 올려놓은 발끝에서는 고무신이 달랑거리고 있었다.


  “피고인의 본적, 연령을 말해 봐요.”

  고등법원 항소심 재판장이 인정신문을 한다.


  “몰라요.”

  그 청년은 아주 느긋한 어투로 약간 말 뒤끝을 올리면서 대답한다.


  “피고인은 일심에서 사실대로 진술했나요?”

  “몰라요.”


  역시 그는 빈정거리듯 대답했다. 정신이상자든가 그 흉내를 내느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대답하는 어조가 동네 친구한테 하듯 가볍고 냉소적이다.


  “본인이 항소해 놓고는 어째 전부 모른다고 하지요?”

  재판장이 약간 이상하다는 듯 되묻는다.


  “....”

  그는 아무 말도 없다. 어쩌면 자신에 대한 재판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다. 그런 것은 종종 사상범 등 확신범에서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그의 죄가 궁금하다.


  “피고인은 범행 당시 환각제인 러미럴을 70알 먹은 상태에서 도끼로 사람을 찍어 죽였지요?”

  “러미럴을 먹지 않았어요. 그냥 맥주 한 깡 먹었어요. 그리고 죽였지요, 뭐..”


  “피고인은 여동생 진숙이도 건드린 사실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맞아요?”

  “네, 건드렸어요.”


  “피고인은 남동생도 망치로 때려 머리를 터친 적 있어요?”

  “네”


  그는 아주 남의 말을 증언하듯 담담하게 대답한다.


  “피고인은 부엌칼로 다른 동생도 찌른 적이 있지요?”
 
  “다 맞아요.”

  “피고인은 여인숙에서 옆방에 여자가 들면 상습적으로 강간을 했다는데 맞아요?”

  “맞다니까요.”


  그는 마치 뻔한 사실을 뭐하러 법정마다 묻느냐는 듯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한단 높은 법대 중앙에서 검은 법복을 입은 재판장이 그의 시야에는 이미 동네 아저씨 보는 것만도 권위가 없어 보인다. 재판장이 알 듯 모를 듯 미소를 짓는다.


  “피고인이 제출한 항소이유서를 보면 ‘저는 죽을 죄를 지은 죄인입니다. 재판장님한테 다시 한번 무릎 꿇고 사죄드립니다.’로 시작해서 구구절절이 사연을 적어 놨는데 피고인의 태도를 보면 전혀 그게 아니네. 어쩐일이지? 이 항소 이유서 피고인이 쓴 거 맞아요? 아니면 다른 사람이 써 줬어요?"

  "아, 그거요? 옆방 아저씨가 써 줬어요."


  “옆방 아저씨라니, 어떤 아저씨?”

  “아, 판사님, 그것도 몰라요? 교도소 안에서 같이 징역 깨면서 글 잘 쓰는 아저씨 말이에요. 그것도 몰라요?”


  “아, 다른 지수가 대신 써 주었다는 말이군.”

  “그렇다니까요..”


  “그러면 항소이유서에 써 있는 말들은 전부 피고인의 뜻이 아닌가?”

  “에이, 난 뭐가 써 있는지도 몰라요.”


  “알았어, 됐어.”

  재판장은 약물중독으로 인한 정신 이상이 아닌가 의심하는 것 같았다.


  “피고인, 치료감호소에 가야 할 것 같네.”

  “안돼요, 재판장님!”


  그는 갑자기 소리쳤다. 재판장이 놀란 듯 그를 쳐다보았다.

  “왜?”


  “재판장님이 그렇게 하면 나한테 욕먹으니까요.”

  그는 다시 마치 동생을 타이르듯 재판장에게 느물거리면서 말한다.


  “욕먹지, 뭐.”

  이제는 재판장이 느물거리면 반격을 한다. 고등법원 부장판사의 직위면 사회적 관료의 직급으로서는 차관급에 해당한다. 판사로 시작해서 오랫동안 고생하면서 마지막으로 가 앉기를 희망하는 곳이 바로 그 자리다. 수많은 재판을 하면서 단련되고 머리가 가을에 낙엽지듯이 희게 되어야만 얻는 자리일 수 있다. 죄수 앞에서는 어떤 면으로는 신 같이 보이는 초임판사는 물로 중견 판사들이라도 감히 얘기를 못할 정도로 어려워하는 직위에 있는 판사다. 층층이 조직화되어 있는 행정부의 관료로서 그 직급이면 바로 밑의 국장이 가져다주는 서류에 결재하는 것으로 업무의 대부분을 보낸다. 법원구조가 특이한 것은 그런 위치라 하더라도 죄인들과 재판정에 직접 부딪치고 말을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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