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정말 암담한데요

운영자 2010.04.22 12:39:19
조회 270 추천 0 댓글 1

  왼쪽으로 어둠 속에 조용히 누워 있는 테아나우 호수를 끼고 내가 탄 밴은 뱀같이 소리없이 구불구불한 산길을 핥아 가고 있었다. 남반구의 하늘에는 하현달이 구름 위로 높이 떠서 희붐히 호수면을 비추고 있었다. 호수 건너편 산 계곡에서 난 산 불빛이 호수 면에 붉은 띠를 이루며 번져 나오고 있었다. 퀸스타운을 가려면 아직도 백 킬로 이상을 가야 하는데 기름게이지의 바늘이 거의 바닥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헤드라이트가 훑어 내는 길만 바라보고 있었다. 차가 갑자기 속도를 늦추더니 길거리에 가서 선다.


  “정말 암담한데요.”

  운전을 하던 박창호가 불안한 기색으로 말한다. 그는 6개월 전 뉴질랜드로 이민 온 청년이다. 한국에서 H전자에 있다가 아내의 폐가 안 좋다고 공기 좋다는 이곳으로 무작정 이민 온 사람이다. 아직 뉴질랜드에 익숙하지 못한 그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임시로 한국에서 오는 사람들의 안내나 운전을 해 주고 있다.


  “이렇게 한 겨울에 갈 길은 멀고 주유소나 인가는 없고 기름은 떨어지고 했을 때 이곳 사람들은 어떻게 응급조치를 합니까?”

  “여기 뉴질랜드 사람들은 평소에 전파를 내는 구조기를 가지고 다닙니다. 만약 산중에서 실종되더라도 그 구조기에서 쏘는 전파를 가지고 경찰이나 구조대가 그의 위치를 알게 되는 거지요. 그리고 이렇게 혹한인 겨울에는 길거리에서 차가 서거나 눈에 갇혀 버릴 위험에 대비해서 항상 차에 약간의 물과 식량 그리고 모포를 준비해 가지고 다닙니다. 잘못하면 아무도 없는 곳에서 굶어 죽거나 얼어 죽으니까요.”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이 겨울에 아무 준비 없이 길이 가다 차가 서게 된 거네요.”

  “죄송합니다.”


  박창호는 아무소리 않고 고개를 숙였다.


  “....”

  막연했다. 무식이 용감이라고 여름에 겨울 나라인 뉴질랜드의 남섬 그것도 하루종일 길을 가야 기껏 다섯 사람 정도 만날까 말까 한 눈 덮힌 벌판에서 차가 휘발유가 떨어져 서 버린 것이다. 초행길에 사람마저 생소한 곳이었다.


  “차가 완전히 설 때까지 얼마나 더 갈 수 있습니까?”

  “비상등이 켜지고도 한참은 가는데 되돌아간다 해도 도중에 만났던 마을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마을을 지나오면서 봤는데 주유소가 있어도 문을 닫고 주인은 가 버린 것 같았습니다.”


  “좌우지간 차를 돌려 가장 최근에 지나온 마을로 돌아갑시다. 도중에 차가 서게 되면 걷는 수밖에 없지요. 가는 데까지 갑시다.”

  방법이 달리 있을 수 없었다. 차에는 통신 수단인 핸드폰마저 없었다. 아직 익숙지 않아 안내 받아야 할 사람이 길을 인도한 까닭인지도 모른다. 차를 되돌렸다. 휘발유로 차가 가는 게 아니라 가슴 속에 흐르는 피로 가는 듯 등골이 쭈뼛한다. 차를 모는 박창호도 그런가 보다.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것 같다.


  어둠 속에서 돌아가는 길이 멀고도 멀다. 끝없이 나 있는 초원이 어둠으로 온통 물들어 있다. 차를 타고 가는 게 걸어가는 만큼이나 힘이 든다. 차는 간신히 깊은 어둠에 묻힌 자그마한 마을로 들어왔다. 밤의 뉴질랜드 산간 마을은 폐허와도 같았다. 사람의 온기란 마을 안에도 없었다. 휑한 길 옆으로 창고 같은 건물 몇 개만 문을 굳게 닫은 채 버티고 있었다. 마을 외곽지에 아까 지나온 문 닫은 주유소가 있었다. 차를 그곳에 댔다. 주인을 찾을 수 없어도 그곳에서 기다리면 내일 아침이라도 기름을 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차를 다른 곳으로 가져갔다가 서면 밀고 와야 할 형편이었다. 차에서 내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불빛 없는 적막한 거리에는 말 한마디 붙여 볼 곳이 없다. 죽은 마을이라고나 할까. 박창호도 주유소 뒤에 있는 야트막한 이층 건물의 주위를 빙빙 돈다. 사람 사는 흔적이라도 찾을까 해서인 것 같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눈앞에 서치라이트 불빛 같은 게 밝게 켜지면서 주유소의 마당이 환해졌다. 그 움츠리고 있던 건물의 모퉁이에 설치한 라이트가 켜진 것이다. 저녁 길을 내내 차로 달리면서 처음으로 사람이 사는 흔적을 본 것이다. ‘드르륵’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면서 뚱뚱한 뉴질랜드인 한 사람이 나온다. 주유소 직원인가 보다. 잠이라도 자다 나왔는지 눈이 부스스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주유기로 오더니 자물쇠를 풀고 차에 기름을 넣기 시작한다. 차에 휘발유가 들어가는 걸 보니 생명수를 마신 듯 가슴이 시원해진다. 살아난 것이다. 사실 해가 저물 무렵 그 주유소를 보았다. 그러나 주유기가 비닐 커버로 덮인 채 아무도 없었다. 기름 게이지의 바늘이 한 삼사십킬로는 갈 수 있는 휘발유의 양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하고 고민했었다. 퀴스타운까지는 100킬로가 남아 있었다. 주유소는 하지 않는다.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절벽에 부딪칠 것을 알면서도 안이하게 길을 떠난 것이다. 그러다가 절박하게 되어서야 되돌아와서 문을 두드린 것이다.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 내가 겨자씨만큼이라도 무엇이 있는 동안에는 간절하게 두드릴 줄을 모른다. 재산 학식 지위 명예 그 모든 것이 부족하면서도 그것을 믿고 바닥까지 내려가기를 꺼려한다. 발돋움을 하고 안 그런 체 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간다. 모든 것이 다 없어지기까지 항복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깨져야 비로소 진실해지고 절실하게 문을 두드리게 되는 것이다.


  차는 여유 있게 다시 퀸스타운으로 향했다. 얼마 후 나는 조그만 도시의 상점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다정한 불빛 사이를 지나갈 수 있었다. 역시 사람은 사람 사이에 기어 살아야 즐거운 것이 아닐까. 1995년 여름 뉴질랜드 여행을 하면서 느낀 마음이다.
 

추천 비추천

0

고정닉 0

0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시세차익 부러워 부동산 보는 눈 배우고 싶은 스타는? 운영자 24/05/27 - -
175 공개처형, 그 참극의 실상 - 차우셰스쿠가 부러워한 북한 운영자 10.06.15 306 0
174 공개처형, 그 참극의 실상 - 당원자격은 정상참작 사유 운영자 10.06.15 158 0
173 공개처형, 그 참극의 실상 - 검사와 비슷한 변호인 운영자 10.06.15 154 0
172 공개처형, 그 참극의 실상 - 요식행위인 재판제도 운영자 10.06.10 162 0
171 공개처형, 그 참극의 실상 - 영장 없이 언제나 체포 [2] 운영자 10.06.10 205 0
170 공개처형, 그 참극의 실상 - 처형방법에서도 독창성 주장 운영자 10.06.10 234 0
169 공개처형, 그 참극의 실상 - 북한 형법교과서의 사형이론 운영자 10.06.10 241 0
168 공개처형, 그 참극의 실상 - 법 위에 당, 그 위에 김일성 운영자 10.06.08 204 0
167 공개처형, 그 참극의 실상 - 믿을 만한 통계 없어 운영자 10.06.08 155 0
166 공개처형, 그 참극의 실상 - 보위부의 살인공작, 고문‧처형 운영자 10.06.08 316 0
165 공개처형, 그 참극의 실상 - 정치범 사형은 국가보위부 재량 운영자 10.06.03 328 0
164 공개처형, 그 참극의 실상 - 한 여교사의 신앙증언 운영자 10.06.03 340 1
163 공개처형, 그 참극의 실상 - 군인도 공개처형 [1] 운영자 10.06.03 406 0
162 공개처형, 그 참극의 실상 - 한국 노래 불렀다고 인민재판 운영자 10.06.03 199 0
161 공개처형, 그 참극의 실상 - 경제범 공개처형 빈번 운영자 10.06.03 226 0
160 공개처형, 그 참극의 실상 - 학생까지도 공개재판 대상 운영자 10.06.03 201 0
159 공개처형, 그 참극의 실상 - 풍기문란자 공개처형은 전통 운영자 10.06.01 485 1
158 공개처형, 그 참극의 실상 - 조총련 상공인 위해 여배우 처형 운영자 10.06.01 1300 1
157 공개처형, 그 참극의 실상 - 즉결처형이 지금도 있는 나라 [1] 운영자 10.06.01 620 0
156 이혼 두번하면 벌금 5천 원 - 입양제도의 부활 운영자 10.05.27 130 0
155 이혼 두번하면 벌금 5천 원 - 당 간부들 대거 이혼하기도 운영자 10.05.27 222 0
154 이혼 두번하면 벌금 5천 원 - 가족법 제정의 의미 운영자 10.05.27 624 0
153 이혼 두번하면 벌금 5천 원 - 대동강변 李家村의 몰락 운영자 10.05.27 293 0
152 굳세어라, 보리 문둥이 운영자 10.05.25 253 0
151 미움받는 유태인 [1] 운영자 10.05.25 433 2
150 추억상속 운영자 10.05.25 232 0
149 리히텐 슈타인 왕국 운영자 10.05.20 289 0
148 감옥과 무덤 운영자 10.05.20 244 0
147 괴테 호텔, 단테 집 운영자 10.05.20 282 1
146 뺑소니 [1] 운영자 10.05.18 239 0
145 월부장사 [1] 운영자 10.05.18 273 0
144 간이 바뀐 친구 운영자 10.05.18 234 0
143 뚝방옆 전과자 교회 운영자 10.05.13 242 0
142 사진관 변호사 영감 운영자 10.05.13 282 0
141 엄마,합의합시다. 운영자 10.05.13 276 0
140 뜨거운 감자 운영자 10.05.11 249 0
139 변호사와 사기꾼 [1] 운영자 10.05.11 432 2
138 두 얼굴의 미인 [1] 운영자 10.05.11 469 2
137 앳된 판사와 심통난 늙은 피고 [1] 운영자 10.05.06 432 1
136 한심한 대리인 운영자 10.05.06 248 0
135 양자 빼 주세요 운영자 10.05.06 239 0
134 벙어리 증인 운영자 10.05.06 244 0
133 복대리(複代理) 운영자 10.05.06 280 0
132 약 좀 먹게 해줘요 운영자 10.05.06 243 0
131 임신한 여죄수 [1] 운영자 10.04.29 637 1
130 야! 가라 가! [1] 운영자 10.04.29 282 0
129 큰일낼 여자네 운영자 10.04.29 372 0
128 직접 실험해 보시죠 [1] 운영자 10.04.27 372 1
127 미녀와 법정 운영자 10.04.27 480 0
126 아마데우스 [1] 운영자 10.04.27 251 0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