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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시작 전 파일럿 격으로 쓴 단편인데, 먼저 읽고 오시면 좋습니다.
*****
심야란 그 이름 그대로 깊다. 모든 것은 이 시간에 침묵하기 마련이다.
선생의 아파트도 그랬다, 그날 전까지는.
"으, 으음... 어라? 여보?"
깊게 잠들었던 선생은, 어느 순간 자신의 옆자리가 비었음을 깨닫고 눈을 떴다. 그런 그가 본 것은, 빛이 새어나오는 안방의 화장실이었다.
"여보, 거기 있... 여보?"
"윽, 우욱..."
살짝 열린 문을 밀자, 선생은 그곳에서 세면대를 붙잡고 헛구역질을 하고 있는 하나코였다. 아내의 그 모습에, 선생은 당연히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여보,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어라? 당신, 언제 일어났..."
"며칠 전부터 이런 거야? 아프면 말을 하지!"
고개를 돌린 하나코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선생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걱정어린 말을 내뱉었다.
"여보, 애가 깨겠어요..."
"아, 미안... 아무튼, 계속 안 좋으면 얘기해야 해? 혼자 무리하지 말고."
선생은 다정하게 아내를 끌어안은 후, 함께 침대에 누웠다. 옆자리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선생은 만족하며 눈을 감았다.
다만, 하나코는 쉽게 눈을 붙이지 못했다.
"이 증상, 혹시..."
그녀는 어쩌면, 새로운 만남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
조금 요란했던 밤을 넘기고, 평소와 같은 아침이 찾아왔다. 세 사람은 함께 식탁에 앉아 간단한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욘석, 야채도 골고루 안 먹으면 나중에 키 안 큰다?"
"아, 아니야! 셋쨩이 먹고 싶댔어! 그치, 셋쨩?"
[퓨이?]
절임 반찬을 가려먹다가 선생에게 걸린 딸은, 괜히 그녀의 로봇강아지 탓을 하며 아빠에게 변명했다. 하나코는 맞은편에 앉아 그 모습을 웃으며 지켜보았다.
"우리 딸, 아빠 말 잘 들어야죠? 다른 학생들은 아빠가 하는 말을 얼마나 잘 듣는데요?"
"알았어... 그, 그치만! 엄마도 밥 안 먹잖아!"
"어, 저요?"
아이의 갑작스런 지적에, 하나코는 조금 당황했다. 그 말대로, 그녀는 아침식사 대신 따뜻한 물 한 잔만을 마시고 있었다.
"우리 딸, 물귀신 작전은 나쁜 거라고 아빠가 항상 말했지?"
"그, 그치만..."
[퓨잇퓨!]
"알았어... 미안해."
다행히 선생과 셋쨩의 꾸중으로 딸이 사과하긴 했지만, 하나코는 역시 딸의 지적이 마음에 걸렸다. 아빠를 닮아 감이 좋은걸까, 라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등원 준비를 하는 딸에게, 하나코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우리 딸, 아빠랑 같이 유치원 갈 수 있죠? 엄마는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응! 다녀올게. 가자, 아빠!"
딸과 선생이 서로 손을 잡고 나가는 것을 확인한 후, 그녀는 곧바로 화장실로 향했다.
"욱, 우욱! 하아, 하아..."
제대로 먹지 않아 신물만 올라오는 것을 느낀 하나코는, 화장실 벽을 짚고 겨우 일어섰다.
"이상하네요... 금방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무슨 연유인지, 하나코는 음식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났다. 아침에 물만 마시고 있던 것도, 도저히 웃으며 식사할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이 말마따나 병원이라도 다녀와야 할까요... 셋쨩?"
[퓨이?]
"주방에 제 핸드폰이 있을 거예요, 가져다주실래요?"
[퓨퓨!]
하나코의 부탁에, 셋쨩은 네 개의 기계 다리로 통통 뛰며 주방으로 향했다. 그동안 입가를 씻은 하나코는, 증상의 원인을 추측해보았다.
"최근에 음식을 잘못 먹은 적은 없었으니 식중독은 아닐텐데... 혹시?"
하나코는 문득 옛 생각이 났다. 졸업까지 한 달도 남지 않았던 때, 어떻게 아이가 생긴 걸 알았는지.
"설마..."
의심하는 새에, 셋쨩은 꼬리의 집게로 핸드폰을 잡고 화장실 앞으로 달려왔다.
[퓨! 퓨!]
"고마워요, 셋쨩. 그럼... 어머?"
핸드폰을 건네받은 하나코는 곧바로 통화 어플을 켰다. 콜택시의 연락처를 찾던 중, 번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아즈사쨩..."
시라스 아즈사. 그녀의 오랜 친구 중 하나이자, 아이를 임신했을 때 자신을 지지해주기도 했던 그녀였다.
무의식적으로, 하나코는 통화 버튼을 눌러 그녀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여보세요, 하나코?]
"아, 아즈사쨩. 빨리 받았네요. 다름이 아니라..."
"그런 일이 있었구나. 다행이야, 마침 D.U. 근교를 드라이빙 중이었거든."
"고마워요, 아즈사쨩. 덕분에 빨리 도착했네요."
바이크를 주차장에 대놓은 후, 아즈사는 하나코의 손을 잡고 병원 접수처로 걸어갔다. 한달음에 달려와준 그녀 덕에, 두 사람은 이른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선생님한테는 연락 안해도 돼? 우리끼리 온 걸 알면 걱정하실텐데."
"그이는 바쁘니까요. 결과가 나온 다음에 알려줘도 될 거예요."
접수 후 대기석에 앉은 두 사람은, 서로 이런저런 근황을 물었다. 바다여행 이후 얼굴을 보지 못했으니, 서로 이야기할 것은 많았다.
"아이는 잘 지내? 선생님이랑 눈이 똑같이 생겨서, 엄청 귀여웠는데."
"그럼요, 착한 아이에요. 세이아쨩이 애완로봇을 보내줘서, 둘이 얼마나 사이좋게 지내는데요."
"세이아가? 조금 의외네. 기계랑 친숙한 이미지는 아녔는데."
"밀레니엄 쪽에 지인이 있다는 모양이에요. 아마 엑스포 때 친해진 모양이던데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 새 하나코의 차례까지 오게 되었다. 진료실로 들어간 두 사람을, 익숙한 모습의 시바견 원장이 반겨주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어떤 일로 오셨을까요?"
"오랜만이에요, 원장님. 사실은 최근..."
하나코에게 간단한 설명을 들은 원장은,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골똘히 생각했다.
"그랬군요. 확실히 임신의 징후이긴 합니다만... 테스트기는 사용해보셨나요?"
"그러진 않았어요. 약국에 들러서 확인해보고 올까도 싶었지만... 아시잖아요, 여자의 감은 때로 날카롭다는 거."
하나코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어떤 각오마저 느껴지는 그 눈빛에, 원장은 농담은 그만두고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경험이 이미 있으시니 잘 아시겠지만, 초음파 검사를 통해 임신 사실을 확인할 겁니다. 간호사가 검사실로 안내할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시죠."
이후 진료실에 간호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고, 하나코는 그녀의 안내에 따라 초음파검사실로 향했다. 그 모습을, 아즈사는 한동안 바라보았다.
검사실 앞 의자에 앉아있던 아즈사에게, 간호사 한 명이 믹스커피를 한 잔 내주었다. 종이컵을 받아든 아즈사는, 커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였다.
"고마워, 간호사 선생님. 바쁠텐데 커피도 대접해주고."
"별 말씀을요. 그 하나코 씨의 친구분이잖아요? 그리고 우리 병원은 꽤 한산한 편이기도 하고요."
하나코가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늘 그녀를 병원에 바래다 준 아즈사였기에, 병원 사람들은 그녀의 얼굴이 꽤 익숙했다. 때문에 이런 소소한 대접이라도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하나코 씨는 좋은 친구를 뒀네요, 이렇게까지 우정을 지키는 사람은 많지 않죠."
"과찬이야. 오히려 내가 친구들에게 받은 게 더 많은걸."
빈말이 아니었다. 어두운 과거에서 그녀를 구원한 것은 누구였는가. 선생과 보충수업부, 모두가 없었다면 그녀는 이곳에 있을 수 없었다.
"하나코는 행복한 사람이야. 본인을 아낌없이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과 결혼해서, 지금은 그 사랑을 아이에게 나눠주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커피를 잠시 옆에 내려둔 아즈사는, 눈을 감고 그때를 떠올렸다. 아이를 임신했을 때, 남편의 사랑이 변할까 두려워하던 하나코의 얼굴.
"하나코는 사실 여린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친구로서 곁에 있어줘야 해. 자기 감정에 솔직해질 수 있도록."
"후훗, 친구분 덕분에 하나코 씨도 든든하시겠는걸요?"
아즈사의 이야기를 경청한 간호사는 조용히 웃었다. 생각보다 깊은 생각을 지닌 아즈사의 말들이, 간호사에겐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러는 동안 커피를 다 마신 아즈사는, 쓰레기통에 컵을 던져넣었다. 포물선을 그리며 단번에 쓰레기통에 들어간 컵을 보며, 간호사는 옆에서 작게 박수를 쳐주었다.
"오늘은 왠지 운이 좋아. 하나코의 검사도, 잘 끝날 것만 같은 기분이고."
"네, 분명 그럴 거예요."
아즈사와 간호사는, 서로 눈을 마주보며 미소지었다.
"린쨩."
"린쨩이라고 부르지 마십쇼."
점심 때가 다가오는 샬레의 사무실. 책상에 엎어진 선생은, 무기력한 목소리로 총학생회 담당고문 나나가미 린을 불렀다.
"또 늦잠을 주무신 겁니까? 그러니까 심야 애니메이션은 녹화로 보시라고..."
"실시간으로 챙겨보는 감동이 있단 말야! 아니, 근데 그거 때문은 아니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린에게 호통을 치던 선생은, 이내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애엄마가 새벽에 잠을 잘 못 자더라고. 그게 신경쓰여서 나도 잠들 수가 없었지 뭐야."
"하나코 씨가요? 그거 유감이군요, 죄송합니다."
"아냐아냐, 사과를 들으려고 한 소리는 아니고. 여하튼 무슨 일 생기면..."
위이잉, 선생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린 건 그 순간이었다.
"응? 무슨 연락이지? 까먹은 일정이라도 있었나?"
선생은 핸드폰을 켜 연락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가 본 것은...
"린쨩, 나 오늘 반차 낼게."
"네? 뭐, 그거야 선생님의 권리이니 상관없습니다만... 무슨 일이라도?"
"미안, 지금 급해서! 나중에 설명해줄게!"
선생은 곧바로 외투를 걸치고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그 발걸음은 가벼웠다.
흑백 사진 속 자그마한 형체, 그것은 틀림없는 태아의 초음파 사진이었다.
한편 아즈사의 바이크는 선생의 아파트 앞에 도착해있었다. 하나코의 헬멧을 벗겨준 아즈사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며 떠날 준비를 하였다.
"벌써 갈 생각이에요? 그이도 곧 오니까, 얼굴은 보고가지 그래요?"
"내 역할은 하나코를 병원에 데려다주는 것 뿐이니까. 이후에는 두 사람이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
지금의 하나코 곁에 있어야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선생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기쁨을 나누는 것이, 가장 행복할 테니까.
"그럼 가볼게. 선생님한테 안부 전해주고."
"자, 잠깐! 아즈사쨩!"
말릴 틈도 없이, 아즈사는 바이저를 내리고 바이크에 시동을 걸었다. 아즈사는 순식간에 점이 되어 사라졌다.
"정말, 자유로운 사람이네요..."
볼멘소리를 내긴 했지만, 하나코는 그런 아즈사의 모습이 싫지 않았다. 그녀의 날개가, 바람을 맞으며 찬란히 빛나고 있었으므로.
"그럼 저도 슬슬 들어가야... 어머?"
뒤돌아서려던 하나코가 본 것은, 주차장에 들어오는 익숙한 승용차였다. 그이의 애차를 하나코가 몰라볼 리 없었다.
"아, 여보!"
"이런, 내가 늦었나? 먼저 들어가 있으라니까."
"괜찮아요, 저도 방금 도착해서."
자연스레 하나코의 허리를 끌어안은 선생은, 그 이마에 살짝 입맞춤해주었다. 새로운 생명을 축복하는 가장 소소한 방법이었다.
"어서 들어가자, 홀몸도 아닌데 추운 곳에 있어서야 쓰겠어?"
"후후, 그럴까요?"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에서는, 온화해지되 식지 않은 감정이 느껴졌다.
가족이 모두 모인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하원한 소녀가 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녀가 먼저 한 일은 엄마의 배를 더듬는 것이었다.
"우와... 진짜 이 안에 동생이 있는 거야?"
"그럼요, 아직은 너무 작지만... 곧 느껴질 거예요."
소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한쪽 귀를 하나코의 배에 바짝 붙였다. 그런 모습마저 사랑스러워, 하나코는 딸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욘석, 그렇게 좋아?"
"응! 같이 놀 동생이 생겼으니까!"
뒤에서 선생이 소녀를 안아올리자, 소녀는 팔을 크게 벌리며 자신의 기쁨을 표현했다. 그 탓에 선생이 균형을 잃을 뻔했지만, 어찌저찌 넘어지지 않은 선생은 소녀를 소파에 앉혀주었다.
"하핫, 그럼 우리 딸이 동생 잘 챙겨줘야한다? 동생한텐 네가 엄마나 마찬가지니까."
"우와! 그럼 동생은 엄마가 둘이야?"
소녀의 엉뚱한 질문에, 선생은 대답 대신 아이의 볼을 마구 문질러주었다. 눈썹을 찡그리긴 했지만, 소녀는 그런 스킨십이 싫지 않았다.
"그나저나 우리 딸은 동생이 생기면 뭐부터 하고 싶어? 지금부터 아빠랑 차근차근 하나씩 생각해볼까?"
"그래! 우선 그림도 같이 그리고, 동화책도 같이 읽고..."
아이 옆에 앉아 이야기를 들어주는 아빠의 모습이, 하나코의 눈에는 기쁨 그 자체로 보였다. 그녀가 바라던 가족의 모습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
정말 오랜만에 돌아왔습니다. 바쁜 일이 있던 것도 아닌데, 너무 오래 걸려 죄송할 따름입니다.
기다려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또 좋은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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