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때는 신선하고 짜릿한 자극도 그에 길들여지면 둔감해지고 그 감흥도 시들해진다더니, A와 B 병장의 관계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나 혼자만을 관객으로 둔 이 한편의 밀리터리 드라마는 분명 일정수준의 재미를 보장하고 있었다.
매일 이어지는 B 병장의 A에 대한 지적과 트집, 그리고 이죽대며 덧붙여서 들먹이는 가스조절기 분실 사고. 그리고 폐부를 찔린 A의 꼰티가 묻어나오는 표정, 그리고 그것을 놓치지 않고 이어지는 B 병장의 2차 갈굼의 패턴이라는 간결한 구조의 스토리를 지닌 이 드라마의 원천 소재는 흡사 무한하게 자가증식하는 세포와도 같았다. 선임의 후임에 대한 갈굼의 사유나 핑계야 지어내는 놈 마음이고 실로 기상천외한 별의별 트집과 명분으로 시작되어 끝이 없는만큼, 분명 이 드라마는 B 병장이 전역하는 한달 후의 시점까지 이어질 것임은 자명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이 드라마가 식상해지기 시작했던데에는 마냥 뻔하디 뻔한 스토리에 대한 나의 싫증 때문만은 아니었는듯 했다. 주연 중 하나인 B 병장이 전역을 얼마 남기지 않게 되자 그 역시 A에 대한 갈굼에 대해 다소 소홀해졌던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관심이 떨어졌다라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하기사, 전역이라고 하는 모든 군인들의 염원이자 진정한 즐거움을 앞둔 시점에서 A 따위가 눈에 들어올리 만무했으리라.
하지만 나는 B 병장과는 경우가 달랐다. 이제 2주 후면 이 드라마에서 하차하게 될 B 병장과는 달리, 나는 아직 갈 길이 멀지 않던가. 좋아하는 배우에 대한 삐뚤어진 팬심이 이러한 것이었을까, B 병장에 대해 남모를 고깝던 마음은 미련으로 이어졌고 미련은 곧 개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기승전결의 구조에서 어느새 '결' 의 단계에에 이르러 그 대단원을 남겨둔 이 드라마를 다시금 '기' 로 롤백시켜 최초의 원초적인 그 재미를 얻고 싶었던 것이 이 드라마의 애청자로서의 바램이자 사실상의 기획자로서 점진적으로 하락세를 타고 있는 시청률과 재미를 반등시킬 유일한 방법이라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기회는 우연찮게 찾아왔다.
탄약 소진이라는 지극히 군대다운 사유의 정기 사격훈련이 끝난 후, 이어지는 수순이었던 총기수입이라는 십여분 남짓한 짧은 시간이었다지만, 다소 둔감해지고 무뎌져있던 나의 기획력이자 잔혹성을 이끌어내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원래는 총기는 늘 휴대하고 다녀야 한다는 것이 어느 군대나 병종을 막론하고 공통된 지침이긴 하였으나 총기가 이미 분해되어 일시적으로 휴대할 수 없는 이 총기수입의 시간만큼은 예외였다. 아무리 융통성이 없는 집단이 군대라지만, 이미 세분화시켜버린 총기까지 다시 재조립해서 화장실까지 들고 가라할만큼의 무식하고도 비효율적인 행동까지 강요하진 않았으니 말이다.
내 옆자리에 앉아서 총열에 묻은 화약의 그을음을 닦아내던 A가 아까 내게 화장지의 유무를 묻던 것이 문득 떠올라 옆을 보니 너저분하게 굴러다니는 K-2의 부품들만 남긴채 녀석은 자리에 없었다.
그리고 그 흩뿌려져 있는 부품들 가운데, 가스조절기가 눈에 들어왔다.
드라마의 기획자라면 아마도 쾌재를 불렀을 호재였다. 그리고 이때만큼은 애청자가 아닌 기획자로서 임하게 된 나는 그 호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가 실없는 잡담을 나누며 총기를 닦고 있거나 혹은 말없이 꽂을대로 총열을 쿡쿡 쑤시고 있었다. 그리고 시선은 모두 자신의 분신이자 애인이라고도 불리우는 총기에 꽂혀 있었다.
나는 괜스레 뒷편의 관물대에서 뭔가를 꺼내는 척하며 은근슬쩍 옆의 A 자리로 몸을 옮기기 시작했다. 운이 좋게도 가스조절기는 가까운 곳에 오도카니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가스조절기를 움켜쥔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의 부대 뒷편의 공터로 향했다. 앞서 말했듯 이때만큼은 총기 미휴대가 일시적으로 허용되었기에 가능했던 무모한 모험이었다.
이 작디 작고 가엾은 철쪼가리는 이제 타오를 시청률의 훌륭한 제물이자 불쏘시개가 되어줄 것이었다. 나는 한껏 주먹에 움켜쥔 그 녀석을 먹구름이 가득낀 창공으로 높이 쏘아 보냈다. 얼마를 높이 솟았고 얼마를 멀리가서 떨어졌건 그런건 중요치 않았다. 이제 남은 것은 다시금 원초적인 재미를 한껏 즐기고 느끼는 것이었으니까.
기대로 가득찬 가슴을 안고 호쾌한 발걸음을 옮긴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A도 어느새 돌아와 앉아 노리쇠뭉치를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제 곧 자신에게 닥쳐올 시련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냥 자신의 일에 열중해 있는 모습이 흡사 머지않아 도축업자의 손에 넘겨질 소가 열심히 밭을 가는 듯한 모양새였다. 나는 홀로 웃음 지으며 연신 곁눈질로 곧 닥쳐올 녀석의 시련을 관음하기에 바빴다.
"어라? 어디갔지...?"
얼마쯤 지났을까, 다들 하나둘씩 총기를 재조립하고 총기함에 수납하는 가운데, A 녀석도 재조립을 완료하고 마무리로 가스조절기를 다시 꽂으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있어야 할 가스조절기가 보이지 않자 한참을 두리번대는 것이었다.
그럴수 밖에.
녀석은 적잖게 당황한 듯한 표정이었다. 하기사, 자신의 역린과도 같은 가스조절기가 아니던가. 그걸 무려 두번씩이나 잃어버린다는 것은 B병장과의 관계를 제외하고 평소 무난하게 군생활을 해오던 A에게 있어서도 다른 선임들이 그를 보는 시선이나 인식마저도 바꿔버릴 수 있는 오명을 다시금 뒤집어쓰는 것과도 같았기에 녀석은 필사적으로 찾아야만 했을 터였다.
그렇게 다시 몇분이 흐르고 소대 내무반에서는 A만이 홀로 총기를 수납하지 못하고 있었다. 총기함을 관리하는 행정병은 어느새 내무반 문턱에 서서 그런 A를 기다리고 있었고 주위의 선임들의 시선도 A에게 몰려 있었다.
"야, 김XX, 너 뭐해? 총기수입 다했으면 얼른 줘. 총기함 시건장치 걸어잠가야 되니까."
행정병 선임의 다그침을 듣는 둥 마는 둥, A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뭔데? 너 뭐 찾어?"
주위 선임들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관물대며 모포며 뒤적이면서 허둥대는 A를 보며 묻고 있었다.
"아....그게.... 아닙니다..!"
B 병장의 앞에서만 보이던 더듬는 말투, 어쩔줄 몰라하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 녀석은 자신의 트라우마 앞에서 한없이 무력한 모습이었다.
"아니긴 뭐가 아냐, 뭔데? 뭐 무슨 문제 있어?"
옆자리 선임의 물음에 녀석은 입술만을 달싹일뿐, 차마 자신이 저지른 실수, 이른바 찐빠에 대해 고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낯익은 누군가의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더라? 아, B 병장이구나. 올것이 왔구나.
"어이구....우리 김XX, 결국 또 찐빠를 낸거야? 이야.... 대단한걸? 두번째나 지금 가스조절기를 잃어먹은거니?"
고개를 돌려보니 B 병장은 이미 A의 자리에 와서 그의 K-2를 이리저리 들여다보고 있었다. A가 잘 정리한 총기 멜빵끈이 그의 손에서 이리저리 풀리며 놀아나고 있었다.
A와 관련된 해프닝에 B 병장이 그걸 그냥 지나칠리 만무했고 그는 무슨 일인가 싶어 A의 소총을 보았을 터였다. 그리고 어쩌면 늘상 A와 연관짓는 가스조절기를 무의식 중에 떠올리고 K-2의 대가리 부분을 보았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본능에 따른 예상대로 가스조절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텅 빈 구멍만이 자신의 치부를 내보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와... 이 새끼 가스조절기 또 잃어먹었네? 야, A야. 이게 맞는거니?"
B 병장의 앵앵대며 이죽거리는 소리에 주위는 술렁거리기 시작하였고 A는 벌개진 얼굴로 이제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만인이 보는 공개석상에서 B 병장에 의해 다시금 자신의 치부를 무력하게 드러내고 쏟아지는 야유와 비난을 오롯이 홀로 받아내게 생긴 그는 그 자리에 그대로 굳은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A가 B 병장에게 뭐라 알아 들을 수 없는 고함을 지르면서 달려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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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참, 이런 경우는 또 처음 보네."
C 수사관은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책상에 모나미 볼펜의 버튼을 툭툭 찍었다. 4평 남짓한 작은 조사실이라 그런지 적막을 깨고 소리는 금방 방을 가득 메웠다.
그의 시선은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피의자 정XX의 수그린 머리에 꽂혀있었다. 정XX는 자신의 죄를 다 시인한 죄인답게 하릴없이 고개만 쳐박고 있었다.
"뭐, 좋아. 그래도 당신이 이렇게 사건의 전말을 다 얘기해줘서 그건 고맙게 생각해. 당신이 아니었으면 애꿎은 김XX만 살인미수에다 덤으로 하극상까지 혼자 콩밥 먹을뻔 했거든. 근데 말이야...."
C 수사관은 말을 흐리며 의자를 바짝 앞으로 땡겨 앉았다. 그리고는 무기력하게 드러나 있는 정XX의 정수리를 바라보았다. 그의 날카로운 눈매는 이리저리 그를 훑어보고 있었다.
"당신 아까부터 계속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다고 하는데, 난 그걸 곧이 곧대로 못믿겠네? 정말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고 생각하는거야? 그거 진심이야?"
".....정말 죄송합니다..."
한참을 뜸들이던 정XX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고개를 쳐박고 있어서 그의 목소리는 웅얼거리고 있었다.
"죄송하긴... 나한테 죄송할게 뭐 있어? 당신은 피해자인 김XX한테 죄송해야지? 아, 그리고 그 얼굴 반틈 날아간 그 누구더라? 장XX 병장, 그 놈한테도 말이지."
C 수사관은 생각하기도 끔찍하다는 듯 홀로 고개를 저었다.
"당신, 개머리판의 무게가 3~4kg 정도 되는거 알아? 그리고 개머리판은 여차하면 백병전에서 무기로도 쓰라고 만든만큼 위협적인 둔기이기도 해. 근데 그 쇳덩어리로 누가 당신의 얼굴을 가격했다고 생각해봐. 그것도 온갖 살의를 담아서 힘껏 친거란 말이지. 장담하건대, 그걸 맞고도 살은 장XX 병장 그 놈이 용한거야. 천운이 따른거라고."
정XX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C 수사관이 하나하나 다시 되짚어주는 자신이 사주한 범행과 그 결과를 듣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지는 듯 움찔거리고 있었다.
"당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 당신은 장난이었다고 말하는 그 행동으로 다른 두 사람의 인생이 작살났어. 한 놈은 얼굴이 아작이 났고, 다른 한 놈은 인생이 작살났다고. 물론, 얼굴이 아작난 놈은 뭐... 맞을 짓을 해서 그랬다지만, 인생 작살난 그 김XX는 어쩔건데? 그 놈 신원조회 해보니 전과도 전혀없고 재학 중인 대학교도 번듯하고 또 성격이나 인성도 나쁘지 않은 괜찮은 친구였는데, 그런 그 놈을 당신이 조져 놓은거라고."
말을 마친 수사관은 착잡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경멸스러운 시선을 담아 정XX에게 쏘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의 인생도 작살났어. 당신은 이걸 장난이었다,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 계속 이런 식인데 거짓말하지 말어. 당신은 분명 김XX 이병과 장XX 병장의 관계를 잘 아니까 그런 짓도 서슴치 않고 했던거잖아. 이미 고의성이 다분한 상태에서 당신은 사실상 이거 살인교사한거야. 처음으로 가스조절기를 훔친거야 사실 나도 수사관이기 이전에 사람이니까 이해한다고 쳐. 근데 두번째는 당신 입으로 직접 순순히 말한거잖아? 김XX의 가스조절기를 훔쳐서 이어질 반응이 궁금했다라고 말이야."
여전히 말이 없는 정XX였다.
"거참... 아니, 당신도 번듯한 학교 다니고 또 전과도 없더니만, 왜 그런 짓을 저지른거야? 아니, 나이가 어리거나 아니면 순 사이코패스 같은 새끼라면 그럴만한 놈이니까 그런다라고 친다지만, 당신 나이를 스물셋 씩이나 먹고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을 몰랐다는게 말이 돼? 그깟 가스조절기라고? 당신한테는 그깟 가스조절기였지만 김XX 그 놈에게는 트라우마였다면서? 트라우마를 자극하면 언제 어떻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게 사람의 생리인데 그걸 몰랐다는게 말이 되느냐 이 말이야."
말을 쏟아낸 C 수사관은 여전히 정XX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 일말의 양심이란건 또 있어서 자진해서 자백까지 할 정도의 자각능력이나 인성이면 이런 짓을 애초에 하지 않았을텐데 말이지... 보면 볼 수록 이해 안되네... 뭐, 좋아. 어차피 구형은 군검에서 할거고 나는 어찌되었건 당신의 말 그대로를 전달할 뿐이야. 다만, 수사관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첨언하겠어. 당신, 해병이라는 이름 두 글자에 걸맞게 자신의 책임은 자신이 지고 그 결과는 받아서 악으로 깡으로 버텨, 알겠어? 당신이 선택해서 한 장난이면 어쨌든 그 장난의 결과도 받아들이겠다는거잖아? 인생에 빨간줄 그여서 좆돼보든, 뭐 어쩌건 간에 당신의 선택이니까 버텨."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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